김씨돌 김용현 근황 sbs 스폐셜 요한 누구?

김씨돌 김용현 근황 sbs 스폐셜 요한 누구?



SBS 스페셜-요한, 씨돌, 용현 1부에서는 세 가지의 이름을 가진 한 남자의 인생을 소개했어요. 


임분이 할머니는 지난 1987년 상병으로 복무 중이던 막내아들 정연관을 잃었어요.  그는 군대에서 훈련을 받던 중 쓰러졌고 그렇게 세상을 떠났다고 합니다.  


전두환 정권이 백기를 들고 물러나면서 시민들은 16년만에 내 손으로 대통령을 뽑게 되고 군에서는 청음으로 부재자 투표를 실시하게 됩니다. 군상부에서 여당 후보를 찍으라 했지만 야당 후보에게 표를 행사했다가 사망한 겁니다. 




"사복을 입은 보안사 요원들이 우리 집에 오는 사람들을 못 오게 조문객들까지 막았다"


"정연관은 부재자 투표 때문에 죽었다"


최초의 부재자 투표에서 상관의 지시를 어기고 야당 대표에게 투표를 해 구타를 당해 숨졌다는 것입니다. 




사실을 가족들에게 알려준 것은 김요한이었어요. 



정연관 어머니는 "요한이가 다 데리고 다녔다. 김대중 집에도 가고 노무현 변호사도 만나고 다 만났다. 요한이 다 연결해줬다"


정연관 형은 "헌병대에서 조사한 기록을 어떻게 알고 요한이 다 가지고 왔다. 너무 고마웠다. 우리는 잊지 못하는 사람이다"


당시 요한이 정연관 상병 군대 선임들의 증언이 담긴 녹음 테이프도 포착되었고 녹음 내용에는 정연관 상병의 석연찮은 죽음에 대한 증언이 담겨 있었다고 합니다. 




2004년 의문사 진상규명위원회는 정연관 상병이 야권 후보에게 투표했다가 선임들에게 폭행당해 숨졌다는 사실을 인정했어요. 


임분이 할머니는 "지금도 이해가 안 된다. 아무 목적도 없이 우리한테 정신을 쏟고 다녔는데 지금은 헤어져 있으니 정말 눈물나게 보고 싶다"


민주화 운동현장에도 있었어요. 



이한열 열사 어머니는 "우리가 아무 것도 몰랐을 때 투쟁 현장 제일 앞에 섰던 사람이다. 얼굴도 기억나고 다 기억난다"




하원근 일병 아버지는 "요한을 보고 우리는 미친 놈이라고 했다. 우리는 가족이 죽었지만 그 사람은 누가 죽은 사람이 없는데 남의 일로 그렇게 제 몸을 부숴가면서 제일 앞에 앞장섰다. 고마웠지만 이상했다"


권희정 열사 어머니는 "요한은 지팡이 역할이나 방패막이 역할을 했다. 부모들 안 다치게 하려고 제일 앞에 앞장섰다"


안충석 신부는 "민주화의 성지다. 한번은 학생들이 데모를 하다 도망을 왔다. 학생들을 잡으러 오니까 김수환 추기경이 대학생들을 잡아가려면 우리를 짓밟고 가라 해서 못 잡아 간 적이 있다. 그렇게 보호해주던 곳이다"




13대 국회의원 이철용은 "정연관 상병 사망사건을 밝혀야 한다. 더 이상 우리 젊은이들이 죽음으로 가지 않게 해야 한다 하고 우리에게 촉발을 시킨거다. 그러면서 국회에 청문회가 만들어지고 특위회가 만들어졌다. 정연관 상병이 야당 후보를 지지하다가 죽었다는 것이 밝혀지면 이것은 이한열, 박종청 열사의 죽음보다 훨씬 더 큰 이슈가 될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당시 여당 입장에서는 이것을 목숨을 걸고 막아야만 했다. 요한에 대해 민정당에서도 '뭐하는 사람이냐. 좌파냐? 종북이냐?'이런 식으로 몰아갔다. 요한 그 사람의 적극적인 노력으로 정 상병에 대한 사건이 명맥을 이어갔는데 이때 3당 통합이 되어 버렸다"




1995년의 삼풍백화점 사건에 민간 구조단장이었던 고진광 씨는 "뉴스를 보는데 구조 장비가 있으면 와달라고 하더라. 배낭에 장비를 넣어서 달려갔다"



"죽어가는 분들을 보면서 살려야겠다는 생각으로 뛰어 들었다. 거기에 강원도에서 온 사람이 하나 있었다. 이 분은 30일 저녁에 왔다. 강원도에서 오느라 늦었다고 했다"


"순수해 보이는 사람이 구조 현장에서는 굉장히 강하게 매달려서 목숨을 걸고 했다"


씨돌 아저씨는 한 생명을 구출했지만 얼마가지 못해 사망했다고 합니다. 




언론사에 사고 희생자의 죽음을 추모하고 책임자를 처벌해야 한다는 내용의 편지를 보내기도 했어요. 


"당시 희생자를 살리지 못한 것에 대한 아픔이 컸던 거 같다. 강원도에서 왔다는 이 분 이름이 요한이었다. 그렇게 불렀다"



그의 이름은 김용현이었어요.  


강원도 정선 봉화치 마을에 사는 자연인입니다. 


배옥희 할머니는 80살이 된 나이에도 혼자 농사일을 했어요. 


"씨돌 아저씨는 뭐든 다 도와줬다"




씨돌 아저씨는 '저절로 농법'으로 자연의 순리를 거스르지 않고 농작물을 키웠어요. 


밭에 씨를 뿌리고 수확할대까지 자라도록 두고 텃밭에는 풀이 무성하고 벌레와 뱀이 살았어요. 


맨발로 지게를 지며 "이렇게 하면 내가 진실하다고 할까"


차를 이용하지 않고 편도 세시간을 걸어다녔어요. 


자연을 보호하기 위해서 도룡뇽을 살리기 위해 이웃농민들이 밭에 제조제를 치는 것을 막았고 겨울에는 사냥꾼들이 고라니를 잡는 것을 막기 위해 고라니 발자국을 지우고 다녔어요. 




그렇게 3시간을 걸어 종묘 가게에 가서 자신이 키운 농작물과 필요한 것들을 물물교환했어요. 


씨돌 아저씨에 대해 "그 아저씨는 모두가 다 친구다. 동물도 친구고 다 친구였다"


배 위에 곡식을 올려두고 눈 밭에 누웠어요. 작은 새들이 날아와 곡식을 먹기를 기다렸어요. 


씨돌 아저씨는 "재미삼아 새들하고 촉감을 느껴보면 너무 좋다"


현재 그가 살던 집에는 인적이 느껴지지 않았어요. 




4년째 그의 소식을 들을 수 없었다고 합니다. 


옥희 할머니는 "참 좋은 아저씨였다. 아저씨가 없으니까 동네가 텅 빈 거 같다. 어디에 가 있는지 소식도 없다"


씨돌 아저씨의 소식을 찾아 5일장을 찾았지만 "돌아가셨다는 말도 있다. 누구 말이 맞는지 모르겠다. 소식을 전혀 들을 수 없다"


서울의 한 시민 단체의 위원장은 "김씨돌씨가 언제부턴가 우리한테 뭔가 보내주신다. 우리는 보물상자라고 부르는 거다. 완전 유기농인 농작물들이 보내졌다. 꽃을 보내주기도 한다"




시민연대 관계자는 "땅을 기부하고 싶다는 의사를 밝히셨다. 왜 그런 생각을 하는지 만나봐야겠다 싶어서 김씨돌 씨를 찾았다. 일관되게 이야기하신 게 있다. 자기는 돈을 갖는 게 무섭다. 활동가들을 위한 쉼터, 명상의 공간으로 만들고 싶다고 했다. 현실적으로 우리가 생각한 게 미안할 정도였다. 주시겠다는 땅을 우리는 못 받겠다고 했다. 그건 우리 스스로 셈을 했던 거다"


봉화치를 누군가가 지켜주기를 바랬지만 시민연대의 거절로 기부는 이뤄지지 않았고 그가 사라진 집만 남았다는 겁니다. 




"세례를 받으셨다. 성당에서 그 분 집에 가서 봉사활동을 상당히 많이 했다. 김씨돌 씨가 글을 많이 썼다. 책을 내려고 글을 쓰고 있는 중이라고 했다. 그런데 내용은 얘기를 안 해주셨다"


옥희 할머니 뿐만 아니라 그의 가족들도 씨돌 아저씨를 그리워했고 그는 조건도 이유도 없이 주변인들에게 모든 것을 베푼 사람이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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